6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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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졸려.
나는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전날 늦게 잔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었다.
잔 시간은 꽤 긴 것 같은데, 중간에 깨서 머리를 쓴 것 때문에 피로가 쌓인 모양이다.
초은이 물어다 준 정보를 어떻게 써먹을까 고민하다가 그만. '어쨌든 지금은 정신 차려야 해.' 나는 눈을 비비고는 탁자에 가지런 히 놓인 서신을 바라보았다.
예화의 서신이었다. 황제의 서신을 이렇게나 편하게 보 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애초에 먼저 서신을 보내는 일도 없겠지만.
나는 새삼스레 내 위지를 자각하며 서신을 열었다.
[산야 보아라.
어미의 갑작스러운 결정이 당황스 러웠겠구나. 미리 말해 주지 못해 미 안하다.
궁금한 것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네 가 몰라도 되는 이야기란다.
후에 네가 많이 크고 나서 설명해 주마.
우선은 어미의 뜻에 따라 주면 고 맙겠구나.
너는 안전하단다. 그 누구도 너를 위협하지 못해.
식사 골고루 하고, 잠 잘 자고 기다 리고 있거라.
모든 일이 끝나면 널 보러 가마.]
주위를 둘러본 나는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서신을 패대기졌다.
안전하다, 괜찮다가 아니라 이유를 물었잖아요, 어머니.
답신을 쓰려 씩씩대고 붓을 들었던 나는 잠시 멈칫했다.
서신은 주고받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대면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나있卍다.
[산아입니다.
송구하오나, 소녀가 궁금했던 것은 그것이 아니어서요.
만나 뵙고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주셔요.]
나는 간단하게 서신을 쓴 뒤 봉해 서연을 불러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이번에도 군말 없이 황제에 게 전하겠다고 대답했다.
내가 가든, 예화가 오든. 어떻게든 만나면 이야기를 해 봐야지.
서신을 보낸 나는 다른 생각에 잠 겼다.
어제 초은이 보낸 서신의 내용이었 다.
서 대륙의 사신들이 가져온, 서 대 륙의 물건들이 엄청나게 값비싸게 팔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여란 가에서 만병통치약을 귀족들 사이에 값비싸게 내놓아 인 기를 끌고 있다는 것.
그중에서도 여란 가의 만병통치약 에 대해 설명이 참 믿기 힘들었다.
몸이 가벼워지고 기분이 좋아지며 고통을 잊는 약이라니.
'사기 아닌가?' 하지만 효과가 없었다면 인기가 금 세 사그라졌을 거고, 초은이 내게 말 해 줄 일도 없었을 거다.
'물어볼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탁자에 놓인 또 다른 종이를 바라보았다.
그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아비다. 사흘 뒤 미시에 백목정에 서 보자꾸나.]
예화가 내 궁의 출입을 모두 막은 게 무색하게도, 아주 평범하게 내게 전해진 기윤의 전언.
그 서신을 보는 게 꽤 뒷맛이 썼다.
늘어난 시선을 의식한 탓인지, 이번 에는 장가로 날아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대범한 방법이 었다.
내게 서신을 전해 준 것은 어린 생 각시였다.
젖살이 빠지지 않은 발그스름한 볼 과 통통한 손을 가진.
배시시 웃으며 내게 내민 쟁반 위 에는 다식이 담긴 그릇과 그 그릇에 눌린 종이가 있었다.
별생각 없이 다식을 한입 물던 나 는 종이를 확인하고는 미처 씹어 삼 기지 못했다.
이러면서 안전하긴 뭐가 안전해.
나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뒤로 물 렸다.
미시에, 백목정에서.
'하필이면 백목정이야.' 황궁에는 세 개의 정원이 있다.
계절마다 한가득 꽃이 피는 산화정, 분재를 관리하는 아미정, 그리고 오 래 묵은 나무들이 많은 백목정.
니, 다른 곳으로 약속 장소를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고.
기윤은 예화가 내게 집거령을 내렸 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하는 건, 그때까 지 집거령이 풀릴 것이거나•••••• 풀 리지 않아도 방법을 만들겠다는 거 겠지.
그래. 그렇게 날고 기는 사람인데. '대체 만병통치약이 월까.' 그리고 그런 대단한 이가 나에게 무일 얻고 싶어 하는 걸까?
사흘 뒤.
내심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나는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여전히 답신이 없는
것이냐.” 내 질문에 희사가 면목이 없다는 얼굴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첫 답신도 기분이 나빴지만, 지금보 다는 나았다.
내 서신에 예화는 삼 일 동안 답신 을 주지 않0갔다.
궁녀들이 전한 말도 없었고, 따로 나를 찾아오지도 않았다.
완전한 무시였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하나 마  음속은 모른다고 했던가.
마냥 믿어 주고 등 떠밀어 줄 줄 알았는데. 정말 예상외의 복병이다.
예화는 내 출입을 막았고, 외부와의 교류도 막았다.
초은에게 정보를 받고 있기는 하지

만, 정보가 정보만으로 존재한다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생각보다 예화는 내게 미지는 영향 이 컸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든 그것을 떨쳐 아 했다.
•••어쩔 수 없다.
한숨을 푹 내쉰 나는 고개를 들었 다.
요 며칠 내 기분이 좋지 않음을 아 는 내 궁녀들은 기민하게 내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오늘 저녁도 먹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폭탄이나 다름없을 말을 꺼냈다.
“마마, 석찬은 드셔야지요!” 그리고 역시나, 희사가 기함했다. 다른 궁녀들의 표정도 똑같았다.
나는 오늘 아침부터 밥을 굶고 있 었다.
점심까지 답신이 오지 않아 점심도 굶었고, 점심시간이 지나도록 답신이 오지 않아 저녁도 먹지 않을 생각이 었다.
아침을 굶는다고 할 때까지도 나를 적당히 만류하던 궁녀들의 반응은 점점 격해졌다.
내가 동궁에 갇혔을 때도 안 그러 더니, 밥을 굶는다는 게 더 충격적인 모양이지.
“번복은 없다, 희사.” 나는 조금 꼬인 생각을 하며 단호 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폐하께 전하거라. 칩거령을 철회하 시기 전까지, 적어도 동궁에 걸음 하 시기 전까지 곡기를 끊겠다고.”
나는 유순한 편이었으나 실없는 사 람은 아니었다.
진지하게 한 말을 궁녀들의 애원으 로 무를 생각은 없었다.
무어라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을 달싹이던 궁녀들이 결국 내게 인사 하고는 방을 나섰다.
예화에게 말을 전하러 가려나. 정말 내가 밥을 굶을지 모르니 두고 볼지 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가 정말로 밥을 안 먹 으면 연통을 넣겠지.
골머리 썩던 일이 어느 정도는 풀 렸다. 하지만 기분은 좋지 않0갔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이건 정말 어린아이의 방법이다.
들어주지 않으면 떼쓰고, 억지를 부 리는 것.
지금 내가 그렇게 비칠 게 빤했다.
숨을 푹 내쉰 나는 찌푸려진 미간 을 꾹꾹 폈다.
어린아이고 나발이고, 지금은 더운 물, 찬물 가릴 상황이 아니다.
기분이 나쁜 건 금방 가라앉을 거 고, 결과는 똑같으니 상관없어.
마음을 다스린 나는 자리에서 일어 났다. 장가에 둔 해시계의 그림자가 보였다.
해가 조금 더 서쪽으로 기운 시간.
미시였다.
잠시 뒤, 나는 정말로 어려움 없이 백목정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방 안에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작게 두드린 것 이다.
작게 연 미닫이문 앞에는 서신을 전해 주었던 그 생각시가 서 있었다. 그 아이는 배시시 웃더니 내게 손 을 대었고, 문에 얹혀 있던 내 손이 사라졌다.
“호위는 떼 두고, 천천히 나오셔
요.”
생각시는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 이고는 총총 사라졌다.
나는 보이지 않는 내 두 손을 내려 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능 못 쓴다면서.' 후궁들이나 간신히 떨친다는 봉인 이라던데.
그럼 재는 생각시가 아니라 후궁이 아?
머릿속에서 어린 생각시를 확실한 첩자로 분류한 나는 뒤를 돌았다.
고운이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혼란스러운 눈동자를 뒤로하고 나 는 발걸음을 옮겼고, 조용히 백목정 에 도착했다.
지속 시간을 백목정까지 걸어가는 시간과 엇비슷하게 해 두었는지, 손 끝에 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손을 꼼지락대며 천천히 발걸 음을 옮겼다.
나무뿐인 백목정은 유난히 고요한 편이었다.
동양의 정원답게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큰 나무들이 독특하게 자라 있 었다.
그중에서도 남에게 띄지 않을 만한 소나무와 향나무, 느티나무들을 지 난 나는 대나무 숲에 멈춰 섰다.
꼭 대나무 숲을 찾아오려던 것은 아니었고, 쭉 지나며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대나무 사이로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입꼬리를 꾹꾹 누르고 활짝 웃은 뒤 그에게 다가가려던 나는 멈칫했 다.
고개를 돌린 남자의 얼굴이 익숙하
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흑발이었
다.
'기윤이 아니야.' 내가 한 발짝 물러섰을 때, 남자의 째진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산야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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